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상하이 사변 (문단 편집) === 상하이 시가전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hanghai_1932_19th_route.jpg|width=100%]]}}}|| ||교전 중인 국민당 19로군|| 일본군이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은 차이팅카이는 즉시 갑북을 수비하던 78사단 6단에게 일본군을 격퇴하라고 지시했다. 중국군은 3만 5천명, 일본군은 6천명이었으나 일본군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함대와 비행기를 비롯한 막강한 화력을 갖추고 있었다. 시오자와 소장은 4시간 안에 상하이를 점령할 것을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19로군은 밝은 지리사정을 바탕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매우 효율적으로 저항했고 오히려 전황은 중국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보흥로에 진입했던 일본군 장갑차들은 창문에 숨어 있다가 수류탄을 던지는 중국군의 저항에 차례로 격파되었고 거리 깊숙히 진입하던 일본군들은 중국군의 습격에 차례로 포위섬멸되었다. 29일 오전 4시, 항공모함에서 20여기의 함재기가 발진하여 시내를 폭격함으로 육전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로군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갑북을 사수했고 오히려 육전대가 큰 피해를 입음으로 육상 전투는 곧 소강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에 일본군은 상하이 시내에 대한 폭격을 더욱 맹렬히 가했다. 어벤드는 상하이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땅이 도자기처럼 마구 흔들렸다. 세차게 부딪히는 느낌과 폭발 소리가 잇달았다. 일본군은 난민대피소와 시민들을 상대로 공격을 퍼부었고 당시 중국 최대 출판사였던 상무인서관이 일본군의 공격으로 파괴되었으며 일본군은 상무인서관 소속 도서관을 습격해 '''송, 원 시대 도서 십수만권을 약탈했다.''' 일본군이 약탈한 서적을 나르는데만 1주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상하이 사변 9개월 후 하병송은 상무인서관에서 내놓던 잡지인 동방잡지 복간호에 <상무인서관 피훼기략>이란 글을 써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오전 10시경, 본관 총공장에 5개의 폭탄이 잇달아 투하되었다. 제1탄이 인쇄부, 제2탄이 복도에 명중하여 폭발, 불길이 치솟았다. 소방차도 이미 손을 쓸 수가 없었고 그저 불타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 후 일본 비행기는 다시 폭격을 계속하여 전 공장이 불탔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모든 공장에는 각종 인쇄용지를 다량으로 쌓아놓었기 때문에 불이 더 잘 붙었던 것이다. 공장의 인쇄기도 모두 소실되었고 종이가 탄 재는 연기를 타고 수십 리 밖에까지 날렸다. >---- >하병송, 상무인서관 피훼기략 1월 29일, 영국과 미국의 주선으로 첫번째 정전협상이 행해졌다. 이들은 휴전에 동의했으나 30일에 교전이 재개됨에 따라 31일에 3일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하지만 일본의 휴전 연장 동의에는 어디까지나 19로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본국의 증원군을 불러올 시간을 벌기 위한 속셈이 있었을 뿐이었다. 1월 30일 해군은 사세보 진수부의 3특별 육전대 474명, 2월 1일 요코스카 진수부 제1특별 육전대 525명을 추가 파병하였고 49척의 3함대를 새로 편성하여 상하이로 출발시켰다. 이 3함대의 사령관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이었고 종래의 1파견함대, 1수뢰전대 외에 순양함 3척으로 구성된 3전대, 항공모함 가가, 호쇼 등을 보유한 1항공전대의 지휘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상하이 공격의 지휘관은 시오자와에서 노무라로 교체되었다. 2월 2일 미국, 영국, 프랑스가 일본과 중국에 통첩을 제시했다. * 1. 중일 쌍방은 즉시 일체의 폭행 및 폭행의 준비 활동을 중지한다. * 2. 중일 쌍방은 적대행위를 위해 동원하거나 혹은 그러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 * 3. 중일 쌍방의 군대를 상하이 지역 내에 있는 일체의 접촉지점으로부터 철수시킨다. * 4. 쌍방이 철수한 지역에는 우군이 주둔한다. * 5. 충돌을 중지한 후 열강의 참가 하에 교섭을 개시하고 부전조약 및 국제연맹 이사회가 결의한 12월 10일의 결의안에 근거하여 중일간의 모든 분쟁을 해결한다. 쌍방이 선결조건 또는 유보조건을 제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증원군을 받은 일본 측은 이 통첩을 무시하고 2월 3일 공세를 재개했다. 이날 국가동방도서관 역시 공습으로 파괴되어 '''1904년부터 수집된 수백만권의 고서적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시오자와 소장을 방문한 어벤드는 서구 언론이 그를 '어린애들을 도살하는 망나니'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렸지만 시오자와는 자신이 230킬로그램 짜리 폭탄 대신에 15킬로그램 짜리 폭탄을 사용했기 때문에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2월 4일 청운로, 보흥로 일대가 일본군의 포격과 소이탄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었고 2월 7일에는 상하이 북부의 오송 지역에 일본군의 공격이 벌어졌다. 하지만 중국군은 1주일에 걸친 일본군의 공세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을 본 노무라는 육전대만으로는 중국군의 저항을 뚫기 어렵다고 판단, 육군의 증원을 요청했다. 이에 육군은 2월 5일 가네자와의 9사단, 제3,제5,제12,근위사단의 일부 부대들을 차출하여 1개 혼성여단을 만들어[* 주로 12사단에서 병력을 차출했다.] 상하이 파견군을 편성했다. 아라키 사다오 육군대신은 우에다 켄키치 9사단장에게 "제국의 중국 본토에 대한 정책은 만몽에 대한 정책과 완전히 그 취지를 달리하여 중국 본토에서는 열국과 협력하고, 상하이 방면에서의 우리 군사 행동은 열국과 협조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 가장 주요한 목적이다."라고 지시했다. 이후 3차 정전교섭이 행해졌으나 일본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결렬되었고 일본은 중국의 항전을 공산당의 음모로 모함하면서 국제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고자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